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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3)-소명


 

 소명은 'calling'이라 한다. 콜링에 응답하고 안 하고는 개인의 몫이다. 평생 콜링을 듣지 못할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이 옳은 길이 었는지에 대한 자문. 현재 내가 걸어가는 길이 옳은 길인가에 대한 물음.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에 과연 옳을 길인가에 대한 고민. 이 속에서 콜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불행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다 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투를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내하 좋아하는 일일 함과 동시에 그 일이 내가 잘하는 일일 경우에 사람은 최고의 선이자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직업 선택에 있어서, 혹은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는 삶의 총체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직업 선택과 자아실현에 있어서 '소명'이라는 번외 주제가 있다. 이것은 굉장히 독특한 주제다. 소명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찰과 신념, 나아가 신적 존재 혹은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내게 소명을 발견했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은 현재 진행형이다. 삶에서 특히 직업인으로 고민하고 성찰하는 모든 과정은 결국 내가 죽고 난 뒤에 후세에 의해 판단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민'과 '성찰'이라고 본다.

 

 교육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주변에서 다들 걱정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담당 교수님도 2번까지는 나를 말리셨다. 다른 사람들 이제 임용고시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단계인데, 왜 갑자기 휴학을 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냥 쉬는 것도 아니라 다른 나라에 가서 해외 봉사겸 선교를 하기로 계획한다는 말에 더 걱정을 했다.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다. 남들은 3학년 끝날 무렵부터 임용고시 본격적으로 준비하는데 갑자기 휴학을 하고 태국을 간다니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셨다. 그리고 3년간 공부한 것을 이어받아 임용고시로 쭉 이어져야 할 텐데 1년의 공백이 생기니 다녀와서 과연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을지 염려하셨다. 그리고 비용 문제도 있었다. 내가 가진 돈은 0원이었으니 당연했다. 

 

 부모님은 내가 해외봉사를 위한 필수 연수를 받기 하루 전까지도 끈질기게 만류하셨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나는 부모님께 '지금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기어코 체념과 같은 허락을 해주셨다. 그렇게 연수를 받고 나는 1달 뒤 교회 두 곳과 선배, 동기, 후배 그리고 지인분들의 후원으로 태국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선교단체에서 해외 선교에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나에게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고 교회의 도움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태국에서 선교사님을 도와 한국어 학원과 교회 사역, 대학교 한글반 동아리 운영 등을 주로 했다. 첫 3달은 태국어 공부에 전념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다보니 청소, 빨래, 설거지 등은 기본으로 도와야 했고 고양이를 키웠기에 고양이 관련된 일도 했고 차량 운행이나 교회 수련회 팀, 선교단체 팀, 태국 내 각종 모임 수련회 등에도 도울 일이 참 많았다. 

 

 태국어 공부를 하며 처음으로 태국 현지인과 얼떨결에 태국어로 통화를 했던 일이 기억난다. 통신사 직원의 통화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몇 가지 질문을 하였고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단어를 말했다. 짧은 정적 후에 태국어 인사와 함께 종료된 짧은 통화였다.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대화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일이 계기가 되어 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 태국어는 아주 매력 있고 멋있게 느껴졌다.

 

 태국에서 한국 학생들을 만난 것은 5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태국 각지에서 제법 큰 교회기관의 자녀들이 모인 자리였다. 나는 일정 하나를 맡아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우리나라 아이들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 연령은 다양했다. 약 20명 정도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태국에 온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그 만남이 나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국에 온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평등한 교육이 제공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었다. 이 아이들에게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싶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태국에 있는 내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국에서 수많은 일정을 소화해내며 다양한 관계를 맺고 어느덧 태국이 자연스러워질 즈음이었다.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다 되었고 나는 한국에 가야했다. 선교사님과는 대화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나누었다. 내가 이대로 한국에 가서 임용고시를 치르고 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물었다. 선교사님께서는 그 자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야기도 해주셨다. 그 말씀의 핵심은 '실력'이었다. 그리고 '실력'은 전문성은 물론이지만 '학위'라는 권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선교사님의 삶을 말씀해주시며, '학위'가 가지는 권위는 사실상 '실력'과 동일하다는 의중이셨다. 따라서 한국에 가거든 그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가르치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태국을 등지고 한국에 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 3일 정도는 후유증이 컸다. 분리불안이었을까. 어찌되었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내가 공부할 곳으로 갔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흐르고 교사로 발령받게 되었다.

 

 재외한국학교가 있다는 것을 신규 교사 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학교가 태국에서 있고 전 세계에 여러 군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나를 필요로 하며, 그 일이 결국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나는 그러한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었다. 

 

 '실력'을 쌓으라는 도전은 늘 마음 속에 있었다. 그 도전은 나를 '대학원'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6년 차 교사가 되던 해에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내 나이 30살의 일이었다. 

 

 내가 마주하는 학생들을 사랑하고,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는 것. 그것은 말도 안되게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재외 한국학교, 재외 한국교육원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꿈꾼다. 어떤 모습일지는 모른다. 어떤 시기일지도 모른다.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전하는 것과 성장하는 것. 고통이 동반되는 모든 과정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할 것이다. 그것이 '소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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