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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4)-임용고사


 연단[鍊鍛]은 단련할 연, 쇠 불릴 단이 합쳐진 말로써 쇠를 달구고 식히고를 반복하는 '담금질'을 의미한다. 담금질을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충분히 높은 온도의 열, 쇠를 구부리거나 펼 때 필요한 망치질, 쇠를 식힐 수 있는 물 등이다. 담금질을 많이 한 쇠일수록 속에 불순물이 없어진다. 그리고 담금질을 많이 할수록 쇠는 훌륭한 작품이 된다. 이 모든 과정을 연단의 과정이라고 한다. 많이 연단된 쇠일수록 값어치가 높고 영롱하다.

 

 연단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연단은 삶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연단이 없이는 우리는 삶의 경험치를 쌓을 수 없다. 경험치가 없이는 어떤 교훈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교훈 없이는 어떤 성장도 이룰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연단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혹자가 말했듯이 전문가란,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인생에 있어서, 특히 자신의 일과 직업에 있어서 이러한 모든 '실패'의 경험이 바로 연단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교사로서 얼마큼 연단된 사람일까?  혹은 반대로, 나는 얼만큼 연단된 사람으로서 교사를 하고 있을까?

 

 나는 교육대학교 과정 중 '교육 실습'과 '정교사 임용시험'이라는 관문을 통해 가장 먼저 교사로 연단되었다. 교육대학교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보통 2학년 때부터 교육 실습이 있다. 흔히 교생 실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교생 실습은 2학년 때 처음 나가게 되었다. 1주일간의 참관 수업이 전부였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육자'로 처음 입문한 상태로 아이들을 처음 마주 대했던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교육대학교 1학년 때에는 사실 내가 어떤 대학교에 다니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교생 실습을 통해 비로소 내가 어떤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불과 6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과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3학년 교생 실습 때는 직접 수업을 하게 되었다. 6학년에 배정을 받았었다. 3주간 진행되는 실습 가운데에 수업 4번 정도, 그리고 전일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전일제 수업이란, 담임교사가 되어 그날 모든 수업을 실시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전담 수업이 있을 경우에는 전담 교과 선생님이 지도하신다. 수업을 준비하며 '수업'을 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한 차시 수업을 위해 각종 교구를 제작하고 PPT를 만드는 등 수업 자료를 미친 듯이 준비한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겠지만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내가 공식적으로 수업 시간에 가르친다는 의미 자체가 굉장히 크게  와닿았었다. 4학년 실습 때도 6학년 아이들을 맡게 되었다. 그때는 담당 선생님과 소통하며 실무에 대해서도 배우고자 했다. 그리고 교직 문화와 교직관 등 보이지 않는 주제에 대해서도 알아가려고 노력했다. 빠르면 7~8개월 뒤에 교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자세히 '교사'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다. 교생 실습은 내가 진정으로 초등학교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게 하였다. 또한 이 직업이 나와 어울리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했다. 나아가 이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에 대한 거대한 질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스스로 그 모든 물음에 답한 나의 결과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이유로서 'YES'였다.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평화로움이 있다. 1학년이건 6학년이건 그 모습과 형태는 다르지만 그 평화로움은 모두 동일하다. 그리고 그 평화로움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이 직업은 나와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10개의 교과를 준비하며 각 교과가 갖고 있는 매력이 정말 다양했다. 따라서 지루할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예상은 적중했고 지금도 절감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다채로운 주제와 다양한 아이디어를 결합하는 이 일은 나에게 굉장히 어울리는 것이라고 느꼈다. 또한 아이들이 보여준 미성숙함과 미숙함, 때로는 성장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반항의 모습을 통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서는 '교사'가 최고의 직업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교사가 되어 한 명의 학생에게 꿈을 꾸게 한다면 그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한 명의 학생을 성장하게 하고 그 한 명이 다시 누군가를 성장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나는 교생 실습을 통해 연단되었다. 

 

 4학년이 되어 정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줄여서 '임고'라고 불렀다.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용고사에 떨어진다면 4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4학년 선배들이 보여준 무지막지한 공부는 임용고사 준비를 시작부터 겁내게 만들었다.   1차는 주관식 필기시험과 교직논술이 있다. 주관식 필기시험을 위해서는 교육과정 총론, 교육과정 해설서, 교육과정 각론의 내용을 공부해야 했다. 교육과정 총론이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원문에서 각 교과의 성격과 목표, 교육 이론, 교육 방법, 성취 기준 등을 핵심적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교육과정 총론이 핵심적인 내용만 기술되어 있다 보니 그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총론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것이 해설서다. 교육과정 각론이란 실제 학교 현장에서 실시되는 교과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과 내용은 학생용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된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통합교과(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의 통합 본),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사회, 도덕, 실과, 음악, 미술, 체육 그리고 창의적 체험활동(자율활동, 동아리 활동, 봉사 활동, 진로 활동)까지가 각론의 모든 내용이다.  나는 임고를 준비하며 특히 국어 과목의 양이 너무 많아서 공부를 포기했다. 교과 내용도 내용이지만 학년별, 학기별, 단원별, 차시별 문학 작품과 비문학 작품 등을 모두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1차 교직논술에서는 주관식 필기시험 범위와 함께 교육학, 교육철학 등을 포괄하여 1200자 내외로 논술을 작성하는 시험이었다. 논술은 스터디 그룹에서 일주일에 1회 정도 함께 준비했으며 스터디원의 학과 교수님들께 첨삭을 돌아가며 부탁드렸다.                                                                                                             2차 시험은 수업 지도안 작성, 심층 면접(구술), 영어 면접(구술) 일반 수업 시연, 영어 수업 시연으로 총 3일간 진행되었다. 1차 시험의 범위와 함께 실제 수업 시연 능력이 필요했다. 2차 시험은 혼자서 준비하기가 어렵다. 누군가가 피드백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1차 시험의 결과가 12월에 발표가 되면 탈락자와 합격자가 나뉘게 된다. 그렇게 합격자들은 12월에 스터디 그룹을 다시 만든다. 그리고 지역별로 다시 세분화하여 스터디 그룹을 만든다. 일부 시. 도에서는 영어 지도안 작성을 추가로 보기 때문에  지역별로 스터디 그룹이 나뉠 수밖에 없다. 

 나의 임고 루틴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1월에는 한국사 시험을 준비했다. 한국사 자격증 3급 이상이 있어야 임용고사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사 3급을 따고 임용고사 준비를 했다. 3월~5월에는 학과나 동아리 친구들과 삼삼오오 돈을 모아서 '교육과정'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개인 공부는 6월부터 시작하였다. 아침 8시 00분 편의점에서 아침을 대충 먹고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성경을 몇 장 읽고 오늘 공부할 목표치를 설정했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밥 먹는 시간, 잠시 산책하는 시간, 스터디 모임이 있는 시간 빼고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밤 10시~11시 까지는 쭉 공부만 했다. 물론 1학기에는 각종 사회적 모임(?)이 있었던 터라 임고에 온전히 몰두하지 못했다. 인터넷 강의만 듣고 복습을 조금 하다가 거의 6월이 되어서야 위의 루틴대로 공부를 했다. 

 

 임고형 인간으로 처음 적응하는 1개월 정도가 매우 어려웠다. 오랜만에(?) 공부를 해보려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친구들과 후배들의 정리 노트가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정성스럽게 인강 내용을 정리한 노트를 빌려준 후배와 친구들에게 지금도 고마울 따름이다. 루틴이 형성되고 나니 의외로 공부하는 게 편했다. 번잡한 고민이나 두려움 없이 공부에만 몰두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스터디 그룹을 같이 하며 정보도 교환하며 가끔씩 수다도 떨었던 친구들이 그립다. 점심과 저녁에 학교 학식을 같이 먹었던 순간들도 기억난다. 임고를 준비할 때는 이상하게 밥을 평소에 2/3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임고를 준비하는 중간에 2번의 모의고사 기회가 있었다. 나는 모두 다 응시했다. 결과는 처참했지만 나의 실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에 과감하게 했다. 모의고사 이후에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렸고 눈물을 보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만큼 시험의 경향성을 예측하기 어렵고 워낙 내용이 방대해서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저 루틴대로 나를 믿고, 스터디 그룹을 믿도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차 시험 날이 되었다. 학교에서 대절해준 버스를 타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주관식 필기시험이 1,2교시로 나뉘어 있었고 3교시가 교직논술이었다. 1교시 시험을 다 치고는 멘털이 나갔던 것 같다. 공부한 범위에서 체감상 50% 정도 나온 것 같았다.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옆 자리에 처음 보는 사람도 앞자리에 있던 사람도 주변을 둘러보며 허공에서 눈을 마주치고 헛웃음만 서로 할 뿐이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2교시도 거의 비슷했다.  3교시 교직논술은 내가 쓴 논술 중에 가장 못 쓴 논술이었다. 마지막에 시간이 부족해서 손을 덜덜 떨면서 거의 필기체에 가깝게 글을 겨우 마무리했다.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반 포기상태로 학교에 돌아왔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어머니께도 전화드려서 정말 어려웠고 내년에 재수도 할 수 있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고생 많았다고 일단 오늘은 푹 쉬라고 하셨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점수가 내 예상보다는 높게 나왔다. 논술은 20점 만점에 14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주관식은 100점 만점에 63점이었다. 어찌어찌 과락을 면하고 2차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필기보다는 실기가 자신 있었다. 멘 땅에 헤딩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은 것 아니겠는가. 지도안 작성은 규격 2~3개를 외워서 어떤 교과 어떤 차시에도 사용 가능한 공식을 반복했고 일반 수업, 영어 시연도 4~5개 만능 교수법을 만들어서 웬만한 차시에 적용 가능한 공식을 만들었다. 스터디 그룹의 도움이 컸다. 그렇게 2차 시험을 보게 되었다.

 

 아는 형의 집에 3일간 머물며 시험을 치렀다. 얼굴에 철판 깔고 하는 것은 자신 있었다. 그리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저 씩씩하게 하고자 했다. 심층 면접과 지도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기출문제와 비슷하게 나왔던 것 같다. 영어 면접은 환경 보호를 위한 실천 방안이었다. 자동차보다는 자전거 이용하기, 샴푸&린스 최대한 줄이기, 재활용품 활용한 수업하기 등을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수업 연은 씩씩하게 했다. 결국 2차 시험 100점 만점에 97점으로 2014학년도 초등학교 정교사 임용시험에 최종 합격하였다. 그렇게 2월에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철 발령을 받았다.

 

 임용고사가 나에게 준 의미는 컸다. 어둡고 긴 터널과 같아서 처음에는 매우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분량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험 경향. 주변에서 들려오는 '카더라' 통신들. 혹시 내가 장수생이 되진 않을까에 대한 염려. 위기의식. 조바심. 모든 것들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정작 이러한 두려움은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설 때에만 사라졌다. 눈을 질끈 감고 일단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비로소 무언가가 발생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발을 내딛지 않으면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다음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목표를 정해야 하는지, 누구와 함께 가야 하는지,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해답을 찾아가게 되었다. 교육대학교에 문을 닫고 들어간 것에 대한 자격지심과 열등의식도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편견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스터디 그룹 모임을 하며 나의 편견이 많이 깨졌다. 나의 재능과 실력은 '사람'과 함께할 때에 비로소 빛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교류하며 소통하며 대화하며 사람들 각자가 지닌 재능과 실력은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하모니는 굉장히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임용고사 자체는 고되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이러한 연단의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예전보다 더 단단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벼슬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일 것이다. 오히려 '흔적'이라고 하면 더 와닿을 것이다. 삶의 순간순간 마주하게 되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큰 사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년은 내 인생에서 삭제하고 공부만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어느 정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어떤 일을 도전하더라도 그때의 나를 기억하며 조금은 수월하게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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