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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1)-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초등학생 때 나의 꿈은 '붕어빵 장수'였다. 겨울에 다 팔고 남은 것은 사장님 혼자 다 독식할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환상이 있었나보다. 마침 붕어빵을 좋아하기도 했었다. 어묵도. 서비스로 먹던 어묵 국물도. 그리고 나의 꿈은 바뀌었다. '화가'였다. 워낙에 뛰어 노는 것을 좋아했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지 않고서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뽀송뽀송한 피부로 집에 들어오는 날은 하루를 헛 살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마냥 뛰어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가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레고 하나를 붙잡고 장편 서사를 써대곤 했다. 히어로물에서 우주의 기원까지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은 서사. 할머니께서 잠시 집을 비우실 때면 나에게 레고나 블럭을 손에 쥐어주고 나가셨다. 그러면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레고나 블럭으로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화책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누나가 만화책을 좋아했었는데 그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만화책을 읽다가 이제는 그림을 따라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림 그리기에 취미를 붙이고 학교에서도 아침 시간에 그림을 그려서 친구들한테 줬다. 잘 그리지는 못했으나 당시 유행했던 만화체를 곧 잘 따라그렸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림을 그려댔다.

 중학생 때 나의 꿈은 '영화감독'이었다. 고3때까지 이어졌으니 이 꿈은 제법 진지했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큰 집에서 가족들과 우연히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영화 부동의 1순위이자 1년에 한 번은 꼭 시간을 내서 보는 영화기도 하다. 계속 봐서 질릴법도 한데 영화 도입부에 주인공과 함께 평화로운 배경음악이 깔리는 장면에서 눈물이 왈칵 나온다. 그리고 '스타쉽 트루퍼스'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 또한 기가 막힌다. 스토리뿐만아니라 영상미, 연출 모두 훌륭하다. SF영화의 바이블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야기 진행도 막힘이 없다. 상업적으로 보았을 때 폭력성과 선정성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배치되어 있다. 다양한 영화들을 논하고자 하지만 각설한다. 너무 길어질 것 같다.

 고등학생 때 '목회자'의 꿈도 꾸었다. 프라모델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프라모델 만들기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의 가족사는 평범하지는 않다. 조금 과장하자면 흥남철수, 1.4후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할아버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들인데 여기서 자세히 다루기는 어렵다. 아무튼 나의 양친은 모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4살 때, 어머니는 고3 되는 겨울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와 누나를 보살펴주셨던 큰 아버지 큰 어머니는 나의 부모님의 되어주셨다. 여전히 나는 큰 아버지 큰 어버니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른다. 그렇게 다섯 식구의 이야기가 내 나이 14살때부터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할머니와 자랐는데 그 기억들을 되짚어 보면 '불우'했던 상황과는 다르게 참 유쾌하고 행복한 기억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와 정말로 밀접한 사람들에게 항상 나는 아버지가 세 분이라고 철없이 말한다. 육신의 아버지, 나를 양육해주신 큰 아버지,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

 

 고3 수능을 치렀다. 산업디자인과 혹은 영어영문학과를 가고자 했다. 수능 이후에 담임선생님이 뽑아 준 대학 리스트를 쭉 보았다. 우리나라에 대학교가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정말 다양했다. 내 기억으로 정시 지원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한 2주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여기 저기 찾아보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대학 지원을 내려놓고(?)있는데 어머니와 누나가 필사의 각오로 내가 가장 턱걸이로 지원할 수 있는 학교와 학과를 찾아보았다. 마침 누나가 방학 기간이라 고향에 내려 온 기간이었다. 그렇게 2~3일 정도 뜬 눈으로 나의 진로를 위해 분투하시다가 '교육대학교'를 찾아 주셨다. 나는 당시에 '교육대학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범대학'과의 차이점도 몰랐다. 내가 당시 까지만해도 '소년.소녀 가장'으로 분류 되어 있었던 터라 특별 전형으로 턱걸이로 교육대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지원 가능한 인원은 3명이었는데 정시 막바지에 4명이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하얀 눈이 내리는 날,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교육대학교 면접을 보러 갔다.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의견'과 '영어수업 시수 증가에 따른 문제와 해결책'이 면접의 내용이었다. 열심히 대답했으나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굉장히 찝찝한 마음으로 건물을 걸어나와 차에 올라 탄 기억이 있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내 생일 전날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티비를 보면서 빨래를 개다가 누나가 나에게 물어봤다. 오늘 합격 발표 아니야? 내가 대답했다. 맞아. 그리고 안방 서재로 가서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했다. 합격이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교사'라는 꿈은 꿔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특별 전형 요소와 수능 성적에만 의지한 결과였다. 그렇게 '교사'에 대해 1도 꿈꿔보지 못했던 한 청년이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들의 중첩이 나를 교육대학교로 이끌었다. 아참, 어이없게도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교사셨다. 내가 정시 지원을 하던 당시에도 현직 교사로 근무하고 계셨었다.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에 내가 그렇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 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주변에 지극히 사적인 존재로서 '교사' 부모님으로 계셨고,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만난 부모님의 지인들도 교사가 많았다. 그렇게 어물쩍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들로 나는 '교사'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었다. 

 


다음화

 

교사,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2)-교육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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