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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절개와 산후조리원
아내는 6시간 정도 진통을 하며 자궁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자궁이 4cm는 열려야 자연분만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2cm 정도 열렸다고 하였다. 더 이상 참기는 어려울 듯하여 제왕절개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간호사 선생님이 와서 몇 가지 의료 정보를 안내해주었다. 서약과 비용 지불에 관한 내용도 빠르게 알려주셨다. 그중에 '페인버스터'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았다. 가격은 5천 원으로 굉장히 저렴한 편이었다. 페인버스터는 말 그대로 고통을 줄여주는 의료 장치였다. 복부 쪽에 긴 관을 삽입하여 제왕절개 부위에 몇 분 간격으로 자동으로 투약되는 구조였다.
12:30에 아내가 들어갔다. 그리고 담당 원장님은 1시 5분 쯤 나오셔서 수술이 잘 끝났고 이제 뒷정리 등을 하면 바로 만나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1시 15분쯤 간호사 선생님이 수술실 문 앞에서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은 트레이를 밀고 오셨는데 트레이에 웬 아기 한 명이 꽁꽁 싸매 져서 응애응애 하고 울고 있었다. 순간 당황해서 '누구 아기죠?'라고 물을 뻔했다. 당연히 우리 아기였다. 그렇게 얼떨떨하게 아기를 1분 정도 보고 아내를 보러 회복실로 갔다. 아내는 1시 20분쯤에 회복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아내를 만났다.
얼굴이 살짝 부어있었고 졸린 표정이었다. 전신마취는 아니어서 정신이 돌아오는 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물을 자주 자주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격려하고 안아주고 천천히 아내 몸을 살폈다. 소변줄이 이어져 있었고 양 팔에 링거 몇 가지가 걸려 있었다.
제왕절개를 하면 보통 4박 5일은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회복 시간을 갖고 개인 병실로 들어왔다. 아내는 걷는 것이 어려워 처음에는 들 것에 의존하여 병실에 들어왔다. 하루는 꼬박 아무것도 못 먹는 다고 했었다. 소변줄을 빼려면 몇 시간 내에 400ml 정도가 소변통에 채워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물만 계속 먹었다.
절개를 한 수술부위에 아무래도 피가 고이기 때문에 양 옆으로 번갈아가며 자주 자세를 바꾸라고 안내를 해주셨다. 그리고 병실에 있는 동안에는 복대를 착용할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미음을 먹었고 서서히 수액걸이에 의지해 걷기를 시작했다. 병실 바로 앞에 미니 정원이 있어서 왔다 갔다 하루에 몇 번을 걸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병원식을 먹었다. 병실에 있을 동안에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몇 시간마다 체크를 하러 오셨고, 봉합 부위 드레싱도 해주었다. 그렇게 3일째에 변을 보고 수술 회복을 하고 있었다.
수술 후 모유가 계속 나와서 유축도 하고 3일째 새벽부터는 직접 수유도 하러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유를 하러 가는 모습을 보며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페인버스터'가 삽입되었던 복부와 절개 부위에서 생겼다. 3일 정도 드레싱을 하면 보통 피가 멈추지만 아내는 수술 첫날과 같이 피가 계속 나왔다. 거즈를 하루에 3개 정도를 바꿨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몸 상태는 괜찮은데 수술 부위 주변에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수술부위를 넘어서서 굉장히 넓은 부위에 멍이 들었었다. 원장님께 진료를 받으며 의견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페인버스터가 근막을 건드려서 수술 중 출혈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드레싱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경과를 지켜보기로 하고 산후조리원으로 옮겼다. 산후조리원은 산부인과 건물 6,7층에 있었다. 산후조리원에서는 식사 시간 외에 3번의 간식이 있었고, 모자동실이라고 하여 오후에 1시간, 저녁에 2시간 신생아를 직접 방에서 돌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코로나19로인해 요가, 목욕 교육 등이 제한되어서 아쉬웠다. 비용은 동일하나 제한된 부분을 합리적으로 보완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조리원 측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신생아 도우미 선생님들께 직접 요청하여 기저귀 가는 방법, 속싸개 하는 방법, 수유와 트림 등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총 10일의 출산휴가를 쓸수 있어서 이번에 5일을 쓰고, 산후조리원 퇴실 날부터 5일을 썼다. 그래서 산후조리원에서는 2일 정도 아내와 같이 있었다.
상처 부위에서는 피가 계속 나왔다. 그러나 양이 줄었다. 아내는 걱정도 많이 했고 눈물도 보였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생업으로 복귀하였다.
아내는 밝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고 며칠 뒤 출혈이 다 멈췄다고 연락이 왔다. 모자동실 시간에 아기와 함께 찍은 사진들도 보내주며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동안 집을 아기 키우는 집으로 세팅을 해 놓아야 했다. 오자마자 분유를 먹을 수 있도록 분유 포트를 깨끗이 씻고 물을 끓여 두었고, 분유와 기저귀, 가제 수건 등을 세팅했다.
산후조리원 퇴실 날이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산후조리원을 찾아갔다. 아내는 평소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멍도 90% 이상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아기를 애지중지 싸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실수한 부분이 여기서 드러난다.
산후조리원 2주를 지내고 나왔으니 으레 대부분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아내의 겉모습만 보더라도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시기였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신생아와 산모는 외부와의 접촉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처가쪽 식구들이 아기와 산모를 빨리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거의 잔치집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24평 집에 성인 7~8명이 모여있는 상황을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하다. 신생아와 산모가 집에 처음 오는 날만큼은 마음은 잔치집이더라도 주변 환경만큼은 산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내도 몇 주만에 본 친적들이라 반가운 마음에 들떴기도 하였고 집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치우거나 청소를 하는 등 굉장히 무리를 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안의 어른들이 계시니 편하게 쉴 수가 없었고,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만 쭉 잤다. 그게 참 기특하기도 하고 다행스럽다고 생각되었다.
음식 냄새에, 어른들 웃고 떠드는 소리에, 축하한다고 켜 놓은 케이크 촛불까지. 모든 것이 신생아와 산모에게 최악의 환경이었다.
결국 식구들이 다 돌아가고 저녁 6시쯤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그러던 중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상처 부위를 보여주었다. 검붉은 피가 꽤 많이 새어나와 있었다. 거즈를 다 적시고 속옷까지 일부 젖은 상태였다. 그때 아기가 깨어서 울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하며 말했고 나는 아기에게 일단 수유를 해야 해서 정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멘탈이 나가게 된 상황이었다.
다시 산부인과 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수술을 해주셨던 원장님이 당직이라 바로 오라고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재입원을 하게 되었다. 수술부위 주변에 작은 알감자만한 혈종이 3개 정도 있었다. 피떡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페인버스터로인해 고여있던 피와 멍이 빠지면서 뭉친 것 같다고 했다. 아기는 도저히 돌볼 수 없기에 신생아실에서 신세를 지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2일 정도 결과를 지켜본 결과 항생제를 투약하자고 하셨다. 양가 부모님들도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아내는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는지 모른다. 왔다 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고생하는 갓난 아기, 다른 산모들은 다 건강하게 퇴원하는데 나만 다시 재입원했다는 박탈감과 두려움, 몸에 이상이 생겨서 큰 병으로 번지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 복합적으로 엄습했다. 곁에서 꿋꿋하게 버텨주어야 하는 나도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갔던 날을 곱씹으며 아내와 아기를 산만함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했다는 후회와 개탄, 분노와 자책이 2일 넘게 지속되었 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기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가 수유 시간에 가면 해맑게 웃으며 배를 채웠다.
항생제 투약 2일이 경과하고 출혈은 다 멈췄다. 알감자처럼 잡히던 혈종도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일전에 요청했던 염증검사 수치도 지극히 정상이라고 통보받았다. 그렇게 7일을 더 입원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2번에 걸쳐서 2주간 산부인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그 이후는 더 이상 같은 일로 산부인과에 가지는 않았다.
재입원 7일의 시간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어떤 것으로도 가르칠 수 없는 교훈을 나와 아내에게 심어 주었다.
1. 섣불리 잔치하지 말 것.
2. 처방에 따라 약을 잘 먹을 것.
3. 수술 후에 자신의 몸을 민감하게 살필 것.
4. 고난의 시간은 서로의 사랑을 더 공고하게 해준다는 것.
5. 우리 아기는 평생의 효도를 재입원 7일의 시간동안 다 하고도 넘치게 했다는 것.
6. 나의 삶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으로 스펙타클했던 제왕절개와 산후조리원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 다음 포스팅에는 '산후도우미'와 '아이 돌봄 서비스'를 주제로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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