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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2014년 4월 16일, 20여명의 학생들과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날이었다. 초임 발령에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도전이었다. 아침 7시. 정신없이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고 버스에 서둘러 탑승했다. 안전 사고와, 실종 등의 사고는 작은 원칙이 어긋날 때 발생한다는 것을 귀에 딱지가 않게 들었기에 아침부터 호되게 아이들을 교육하고 버스에 탑승했다. 정신 못차리고 떠들다가 안내를 안들은 아이들에게는 앉았다 일어섰다를 시키기도 했다. 일단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전 사고는 눈 깜빡할 새에 발생한다는 것을 경각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미리 약속한 대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고, 6학급의 모든 5학년 학생들이 버스에 탑승했다는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우리가 생활하던 도시를 얼마쯤 벗어났을까? 관광버스의 티비에서 여러가지 아침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때 확인을 못했는데, 우리 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말해줘서 처음 들었다. 수학여행 출발한 지 얼마 안되어서 아침 방송에서 말하길, 여러 학교에서 수학여행 시즌을 맞아 다양한 곳으로 떠났는데, 그 배들 중 '세월호'라는 배도 언급이 되었었다는 말이었다. 배 이름이 독특해서 버스에서 아이들끼리 몇 번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었다는 것이었다.

 지쳐 잠이 들었다가 휴게소에 도착했다. 선생님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다시 수학여행 목적지인 경주를 향해 출발하려고 했다. 버스에 탑승하여 티비를 켜니 뉴스가 다시 나왔다. '세월호'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구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에서 수천년을 살아 온 민족인데 구조 작업에 뭐 큰 문제야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점심 즈음에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했다. 경주에 도착하여 첫 번째 코스인 화랑 체험장에 갔다.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 중 친한 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월호 뉴스가 오보였고, 지금 구조가 한창이라고. 근데 작업이 매우 더디다고 말을 덧붙였다.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 긴급하게 회의가 열렸다. 교장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현재 세월호 사태가 아주 심각한 상황이고 우리학교 학부모님들께서도 염려가 크다고 말이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학부모 단체 문자였다. 수학여행에 이미 와버렸는데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모든 코스를 이동할 때에 학생들 사진이 첨부된 사진을 포함하여 아침, 점심, 저녁 등 하루 3회 이상 학부모 단체 문제를 발송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살얼음판 같았던 수학여행을 마치고 복귀하였다. 복귀와 함께 우리는 너무나 큰 누군가의 상처를 받아들여야 했다. 2014년 봄, 우리는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는 여전히 우리들에게 큰 트라우마이자 상처로 남아있으며, 여전히 학교 현장에서 안전 교육이라는 주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마주하기 힘든 사례'로 남아있다.


 [그날,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라는 책은 살아가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사의 잔혹한 일들에 관하여 전능자의 역할과 책임이 어디까지인가를 날카롭게 추긍하는 책이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라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매우 민감해질 수 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소재로부터 인간사에 드리웠던 어두운 과거들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하는가를 논한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를 포함하여 세계대전, 대기근, 인재, 자연재해 등 인간사에 등장한 수많은 고통과 고난에 대해 저명한 신학자와 석학들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담아내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간추리자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은 반드시 희망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라고 보여진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그 목적과 때가 있다. 우리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의 탐욕'에 의한 자범적인 고난과, 하나님이 특수하게 허락하신 '고난'은 동일 선상에서 분류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역사의 순간에 분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해석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성전(거룩한 전쟁)'과 굉장히 특수하게 발생한 하나님의 현현, 세례 요한 이전의 예언의 성취 등을 제외하고는 인간사 대부분의 거시적 고통과 고난은 '인간의 탐욕'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 책은 ‘운명’과 ‘숙명’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우리 삶에 들이닥친 고난들을 인정하라고 말하기 보다는 ‘섭리’의 관점에서 희망을 찾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적인 삶을 몸소 살아내어 나뿐만아니라 주변에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삶의 고난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온당한 태도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권면이 될 것이다. 누군가가 감당해야하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고난과 시련 앞에서 '섭리'와 '희망'을 운운하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권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누군가는 분명히 질문하고 듣고 싶어하는 부분에 대해 '신정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며 독자가 스스로 분별할 것을 안내한다.

 

 세월호 참사는 절제하는 법을 몰랐던 몇몇 인간의 욕심에 의한 인재였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었던 일부 리더들의 분별력 없던 리더십의 부재가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던 무책임한 담당자들이 있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사회적 입지와 정치적인 표를 얻으려 했던 모든 정치인들의 탐심이 있었다. 나아가 재난 앞에서 무엇을 해야야하는지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지 못했던 실력 없었던 행정부로인한 복합적인 재앙이었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와 아우슈비츠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논지가 전개되는 듯했던 이 책의 전체적 분위기는 조금 아쉬웠다. 즉 인간의 무책임에는 함구하며 하나님께는 무한한 책임을 전가하도록 하려는 시도가 살짝 아쉬웠다는 것이다. 전능자에게 모든 권한이 있으니 전능자가 다 책임져라는 것은 전능자가 횡포하여도 아무말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칼빈과, 칼빈의 정신을 계승한 신학자들은 예지와 예정이라는 주제를 개인의 ‘구원’과 '회심'과 관련하여 사용하였지, 단순히 카톨릭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교리로서 예지예정을 체계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칼빈주의는 예지.예정의 교리를 사회 현상에 관하여 과하게 적용하지 않았지만 본 책에서는 신정론의 이해를 위해 예지.예정론을 다소 확대하여 적용하려 하였던 것 같다. 그 부분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 아닐까 덧붙인다.

 

 *미학적 신정론에서는 1. 아름다운 세상에는 어둠이 필요하다. 2.환란을 통해 그리스도인을 성숙하게 하신다. 3.역사의 심판을 통해 시련을 극복하거나 악을 제거하신다라고 제시하였다. 1번 주제는 반추해봐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는 아름다운 세상에는 굳이 어둠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아름다웠던 세상이 광명을 잃은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자 죄의 결과지 성경 어디에도 아름다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어둠이 필요하여 죄를 허용한다는 뜻의 본문은 없기 때문이다. 2.환란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성숙하여 진다는 것은 말 자체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사를 경험한 우리 이웃과 유가족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종의 퀘스트로서 환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성의 상실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3번 주제가 [세월호 참사]를 위시한 역사의 어두운 사건.사고들에 대한 가장 안전한 결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선한 의지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의 적극성이 이 문장에 추가되어야 더욱 온전해질 수 있는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질문은 아래와 같다.

 


전능자가 인간사에 개입하여 역사 속 각종 참사의 중심에 있던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권능에 동의한다면,

나의 의지와 행동이 통제될 수 있는 가능성에도 흔쾌히 동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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