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교사, 실패 경험담(3)-손목의 흉터
2018년 나의 모교로 발령을 받아 왔다. 드넓은 바다가 아름운 곳. 호수와 산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는 곳. 주말과 공휴일, 명절이 평상시보다 더 붐비는 곳.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운동장은 그대로인데 체육관과 급식소가 새로 생겼다. 건물 외벽은 보수공사도 하고 가벽도 몇 개 세웠으나 실내 구조는 아련하게 10여년 전 그대로 남아있는 듯했다. 감회가 참 새로웠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방방타기와 축구, 디아블로와 스타크래프트가 인생의 전부였던 초등학생이 이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 다시 학교에 출근하였다. 심지어 내가 초등학생 때 계셨던 은사님들도 몇 분 계셨고 눈에 익는 분들도 더러 있어서 매우 놀라웠다. 내가 졸업했던 교실 바로 옆 반에 배정이 되었다. 나는 6학년 학생들은 올 해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 긴장도 되었고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은 막연한 사명감이 앞섰다. 무엇보다 이 곳은 어디인가? 나의 모교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솔직히 조금 더 무거웠다. 물론 요령은 없었다. 아이들을 참되고 바르게 가르치겠다는 큰 열정과 열의는 '사랑'의 표현보다는 '엄격함'과 '훈계'로 드러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3월 초, 긴장되는 공기 속에서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6학년은 학생을 가르치는 보람이 너무나 크고, 제법 '나'답게 설명하더라도 아이들이 의례 내용도 잘 이해하고 말도 잘 통한다는 강점이 있다. '나'답게 가르친다는 것은 저학년 아이들을 대할 때 필요한 건전한 색안경(?)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각종 필터(?)라는 다소 불편한 절차들이 제법 줄어든 상태로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4학년 정도로만 학년급이 내려가더라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어떤 개념이나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이 정말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학년이 낮아질수록 내용은 쉬워지나 설명하기는 어려워진다]는 명언이 있다. 아무튼 그렇게 긴장 속에서 6학년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학기 초에 기세를 잡아야 한다는 주변 선생님들의 조언들이 있었다. 어디 학교에 가나 선배 선생님들은 비슷하게 말씀해 주시는 듯했다. 처음부터 긴장 늦추고 아이들을 편하게 대하면 반드시 1학기 끝나기도 전에 사고가 난다는 충고였다. 그러나 너무 과하게 기강을 잡아서는 아이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학기 초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가뜩이나 군대에서는 엄연히 '조교'와 '분대장'을 맡았 본 기억이 있어서 제대 후에도 군대식 습관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학기가 시작되었고, 어느정도 안정적인 사이클이 유지되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아이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듣고 교사인 내가 바뀌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속시원히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서로에게 맞추기도 하며, 양보도 하며. 교사와 학생의, 학생과 학생의 지지고 볶는(?) 1학기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만나본 아이들 중에 머리가 가장 좋은 아이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더위가 막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보건 선생님께 메신저가 왔다.
A학생, 아침 일찍 손목에 상처가 있어서 보건실에 들렀는데요 아무래도 일반적인 상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A는 평소와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A는 평소 주어진 과제나 학습문제 들은 잘 해결하였으나 친구 관계가 다소 협소해보이는 친구였고, 주변의 신경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는 친구였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보다 신경질을 자주 내는 모습을 보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A에게 가서 오늘 방과후에 잠시 선생님을 좀 보고 가라고 안내하였다. A는 충격적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하였다. 지난 밤 자신의 방에서 자해를 했다는 말이었다. '자해'라는 상황을 마주하니 정신이 멍해졌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고, 당혹스러움과 동시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일단 정신 차리고 A의 말을 듣고자 했다. 아이의 말을 10분 정도 들었던 것 같다. 극심한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자해를 하였던 것 같았다. 다행히 실어증 걸린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무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다. A의 행동은 '자살'을 목적으로 하려는 '자해'와는 다른 분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트레스의 근본적인 원인은 '관계'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애정결핍'이 있었다. '관계'의 문제로는 친구와의 문제도 있었고 가정에서의 문제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SNS가 있었다. 상담 내용을 자세히 기술할 수는 없어서 여기까지만 쓰겠다. A에게 일단은 상처 치료가 우선이라고 하였고 추가적으로 선생님과 만남을 갖는게 좋겠다고 하였다. 상처를 보니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의 연약한 살 위에 1~2mm정도 깊이의 5~7cm길이는 되어 보이는 예리한 칼 자국이 3~4개 그어져 있었다. 아찔했다. 그렇게 약 1주 정도 방과후 만남을 가지며 A를 위해 신중하게 다양한 시도를 했던 것 같다. 행복, 관계, 가정, 진로, 안전 등 대화의 주제도 다양하게 말이다. 물론 보건 선생님과 전문 상담 선생님, 관리자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자해'와 관련한 '자살징후' 행동은 학생의 의견과는 별개로 학교 관리자에게 즉각 보고를 하게 되어있다. 물론 상황을 면밀하게 살피신 교감선생님께서는 담임 선생님의 상담과 추후 회복 상태를 보고 유연하게 판단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면 어쩔 수 없이 경찰과 교육지원청의 협조를 추가로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불과 1주일을 남겨 둔 시점이었다. A학생도 어느정도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시기였고, 생활기록부 작성과 평가 마무리로 정신 없는 여름을 보내고 있던 시기였다. 아침에 학교를 평소보다 일찍 갔다. 일찍 온 아이들 몇 명이 나에게 오더니 A가 사고를 쳤다고 한다. 무슨 사고? 라고 반문하는 찰나 뒷문에서 손목에 뭘 감고 후다닥 자기 자리로 가는 A가 보였다. 지금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고, 하늘을 많이도 원망했다. A가 다시 '자해'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학교 화장실에서 말이다. 아이들에게는 학습 활동을 많이 부여했고 자습을 안내한 다음 A와 긴급 상담을 하였다. 이제는 위기관리 책임자로서 어쩔 수 없이 경찰과 교육지원청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단 A의 말을 들어보았다. 어떤 이유로 다시 자해를 했는지 말이다. A는 아침에 친구들이랑 칠판에서 그림 그리면서 놀고 있는데, '라면에는 김치가 딱이지.'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김치녀'라고 놀리는 듯한 뉘앙스를 느껴 수치스러움과 자괴감에 화장실로 달려가 자해를 했다고 했다. 아침에 놀던 친구들과도 따로 상담을 해봤다. 칠판의 그림도 아침에 본 기억으로 정말 아무런 오해의 소지도 없는 라면과 케익 등의 그림들이었었다. 정황상, A의 완벽한 오해이자 확대 해석이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도 매우 당황했었고 '김치녀'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고 있는 애들이었다. 나 또한 어이가 없었다. 같은 반 학우끼리 좋아하는 음식을 칠판에 그리다가 음식 궁합에 대해 누군가 무심코 한 마디 말한 것으로 A는 팔목에 칼을 그은 것이었다. 심지어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비판하려는 의도도 아니었고 정말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문맥상의 대화였다. 내가 지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간 것이라고 판단하여 일단 상처 치료 후에 다시 상담을 이어았다. 그 후에 들려 온 말은 정말 오랜만에 내 다리를 후덜거리게 하였다. 담력이 약해지고 두려워서 교실에 들어가기 싫었다. A는 자기 말고 우리 반에 자해를 한 친구가 2명이나 더 있다고 말했다.
단 하루도, 허투로 수업하기를 싫어했고 참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모범으로 증명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나의 모든 수고와 열정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학생의 교육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으며 얼마나 몸부림쳤던가, 그러나 한 학급에 세 명이나 '자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허무하고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분노와 허무함에 취하기 보다는 일단 학생들의 안전과 성장이 우선이었기에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B라는 여학생은 주말에 자기 빼놓고 친구들이 놀라갔다는 소식을 듣고 상처받아서 손목을 자신의 날카로운 손톱 부분으로 찔끔찔끔 그었다고 했다.
손목에 짧게 짧게 긁혀서 흉진 자국이 있었다. 청소년 관람불가의 무서운 공포 영화에나 나올법한 끔찍한 행동이 초등학교 6학년의 여학생의 방에서 자기 자신에게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C라는 남학생도 비슷했다. 친구들이 자기 빼놓고 게임을 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집 자기 방에서 손목에 족히 10cm는 넘는 길이의 칼자국을 7~8개 그었다는 것이었다.
배신감을 느끼고, 따돌림 당한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랬다는게 이유였다. 더 이상 '이해'의 영역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직감을 했다. 이건 '이해'의 영역이 아니었다. C학생의 자해로인한 상처의 깊이는 1mm정도 되거나 더 얕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담 과정에서 아이들의 자신의 부모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자해'라는 것은 교사가 결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관리자에게 보고하고 대책 마련을 하였다. 학부모 상담이 그날 바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세 명의 아이 부모들은 수화기 넘어로 모두 까무러치게 놀라는 듯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에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을 느껴 목소리까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전문 상담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방학 전까지 상담을 매일 실시하기로 하였고, A라는 학생은 방학 중에도 등교하여 상담할 것이 요구되었다. 또한 교육지원청의 위기학생관련 전담 부서가 있는게 그 부서와 협력하게 되었고, 정신치료 목적의 전문 의료상담도 추가가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대하고 추후에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하고 또 교육하는 것이었다. 학교 안전 교육은 1년에 17시간 이상이 배정되어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생명존중 교육과 학교폭력예방 교육, 시설 안전 교육 등의 교육이 선행되었던 상황이었다. 교육부나 지자체에서 배부하는 1차 교육자료를 다시 학생들의 상황과 실정에 맞게 연구하고 재구성하여 열과 성의를 다해 교육한 후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의 허무함과 자괴감이 컸던 것 같다. 학교에서 교육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주체가 그것을 자신의 삶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상,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으며 소귀에 경읽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안정과 성장이었다. 방학기 시작되기에 더 이상 경과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저 아이들을 따로 만나 너희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이며, 너희를 돕고자 하는 어른들이 어디에 있고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정말 아무런 고민하지 말고 말해달라고 하였다.
6학년은 또래집단기에 속하는 발달 단계의 특성을 강하게 보인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권위'를 존중하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반면, 자신과 또래에 관한 강한 관심과 애착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또한 모두가 아는 사실일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시기에 '관계'에 관한 왜곡된 반응과 해석이 지속적으로 형성된다면 그 아이들은 일상생활에서까지 큰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이건 이론으로도 제시되어 있지만 수백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며 체감상 경험상의 설명이기도 하다. '관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애정'에 기반한 외부로의 반응인데, '애정'이 결핍된 아동들은 '관계' 자체에 집착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관계'에서 나의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과도한 해석을 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에대한 스스로의 믿음이 확증되었을 때에는 사람은 그 스트레스의 해소로서 '자해'나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애정결핍'은 '관계' 자체에 관한 강한 집착을 낳고, 그 '집착'으로인해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결국 자신을 해코지하는 '원동력'으로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래집단기에서 '관계'에 집착하는 아동들은 사회의 질서나 규범, 교사나 부모의 권위는 이미 우선순위에서 한참이나 뒤로 밀려있다.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모르는 우리 학교 애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학교 끝나고 같이 갈 친구가 없는 모습을 보며 친구들이 나를 놀리지 않을까, 생일에 선물을 못받으면 창피하지 않을까, 다른 애들끼리만 놀러가는 걸 보니 나는 왕따구나, 나는 쓸모없는 존재구나 등의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자신을 완전히 함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2학기가 되어 아이들은 많이 안정이 되어 있었다. 첫째로는 부모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가정에서 아이를 향한 애정과 사랑이 증가하고, 대화를 많이 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둘째는 스스로의 변화였다. 소귀에 경읽기라고 치부할 수 있었겠지만, 학교에서의 안내와 전문 상담을 통한 '안전교육'과 '생명존중교육' '관계'에 관한 교육과 가르침은 이제는 피부로 와닿은 경험과 교훈이 되어있던 것이다. 셋째는 교사의 변화였다. 충격과 공포의 '자해'사건을 겪으며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학교 가기가 싫어졌었다. 자괴감과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었다. 도저히 나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련의 사건들로인해 기가 쇠약해졌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내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사건들이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눈 앞에 가시밭길이 훤히 예정되어 있더라도 그 길은 온전히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기 원했다. 그리고 하나 하나 마주하였다. 그렇게 교사가 변화 되었고, 교사가 성장한 만큼 아이들의 성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SNS를 타고 '자해'인증이 곰팡이 퍼져나가듯 청소년들에게 퍼져나간 시기가 있었다. 내가 '자해'사건을 마주한 해도 바로 그 해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에게 '무기력'과 '관심구걸'이라는 상반된 주제는 가장 지독하며 지저분한 암세포가 되어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다. 허무주의와 집착.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이지만 이 둘은 묘하게 연결되어있고, 그 가교 역할과 홍보 담당을 우리 시대의 SNS라는 것들이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러한 지저분한 것들이 자기도 모르는 체에 잠식당해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은 행복해야 한다. 안전해야한다. 그리고 그 일들은 이 사회의 어른들이 자기 십자가를 올바로 짊어짐으로 시작된다. 아이들이 '관계'로 인하여 힘들다면, 그것은 관계의 '모범'을 보여준 어른들이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웃으며 뒤에서 뒷담화 하는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모습들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았는가? 책임지는 '권위'가 아니라 특혜만 누리는 '권위주의'로 아이들을 구속하지는 않았는가? 학생들의 아픔에 공감하기에 앞서서 '나때는~'이라는 치트키로 아이들을 찍어 누르지 않았는가? 이제는 다컸다는 자기 위안과 변명으로 아이들이 'SNS'로 무슨 영상을 보며 무슨 행동을 하는지 최소한 '지도'해야하는 어른의 책무는 저버리지는 않았는가? '요즘 애들은'이라는 색안경으로 아이들의 고민과 외로움을 덮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어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심각하고 진중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 있는 학생은 없고, 문제 있는 부모와 문제 있는 교사가 있을 뿐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렇게 나의 세 번째 교사, 실패 경험담(3)-손목의 상처를 마친다.
반응형
'교육 > 교단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사와 학부모의 책임으로 알아보는 초등학교 '인성교육'.[기본 생활 습관] (0) | 2021.06.04 |
---|---|
교사, 실패 경험담(4)-'지극정성' 학부모에서 '지(知)'와 '정(情)'이 사라진 '극성' 학부모 (0) | 2021.05.28 |
교사, 실패 경험담(2)-ADHD (0) | 2021.05.04 |
교사, 실패 경험담(1)-삼진아웃 (0) | 2021.04.30 |
개학 첫 날 연차 쓰는 교사. (0) | 2021.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