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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실패 경험담(2)-ADHD


 

주의력결핍 및 과잉행동장애. ADHD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어봤을 것이다. 그 사전적 정의는 '주의산만, 과잉행동, 충동성을 주 증상으로 보이는 정신질환'이라고 한다. 흔히 주택가에서, 아파트 단지에서, 혹은 식당이나 카페, 여행지에서 씩씩하게 돌아다니며 노는 아이들을 적지 않게 봐왔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지나가다 보며 어른들은 그저 이렇게 말한다. 목소리가 크네, 장군감이네, 씩씩하네. 왜냐하면 여기서 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들이 사방이 가로막힌 교실 현장에서 20여명이 넘는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과연 칭찬 한 번으로 넘길 수 있을까? 하루 약 6시간, 일주일에 5일, 방학을 제외하고 약 9개월을 지속적으로 그런 아이들과 지낸다고 가정해 보자.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인내심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한들, 아이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방법이 체계적으로 훈련된 사람이라 한들 0.1%의 사람들을 제외한 99.9%의 사람들은 몸에서 사리가 나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마음 깊이 새기게 될 것이다.

 

2015년 봄, 나는 군대에 갔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무조건 가야하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큰 거부감이나 부담감은 없없다. 어짜피 가야된다면 그냥 가서 건강하게 잘 지내다 올 심산이었다. 시커먼 용사들과 약 2년의 시간을 부대끼며 강원도 춘천과 화천에서 생활하였다. 우여곡절이 많았고, '한국말만 사용하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배운 일련의 교훈들이나 인연들도 있었다. 군대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 때에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시커먼 군대에서 유난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학교가 그리웠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운동하는 아이들, 열심히 배우려는 모습들, 지지고 볶는 모든 것들이 그리웠다. 그렇게 2017년 겨울, 제대하였다.


패기있게 내가 군대가기 전 학교로 복귀하게 되었다. 교육대학교 4년, 교육 현장 1년을 지내왔다지만 정말 컴퓨터 포맷하듯 대부분의 감각과 기능을 상실한 것 처럼 느껴졌다. 그냥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는 생각으로 주변 선생님과 동료들에게 이것 저것 물어가며 우리 학생들처럼 학기 초 적응을 하고 있었다. 

 

4월이 다 지나가기 전 교감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00초등학교에서 전학생 한 명이 올텐데, 학생 수에 따라 순위를 따져보니 우리 반에 들어가게 될 것 같다는 말씀이었다. 전입 전출생은 흔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따로 불러서 말씀하실 이유가 있나 생각하는 찰나에 교감선생님께서 말씀을 덧붙이셨다. 아이가 좀 힘든 아이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이어진 말씀이 너무나도 웃겨서 교무실에서 함께 웃었다. 그 웃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몰랐다. 전출 학교 교무실에서 이 아이가 전학간다고 하니, 교장, 교감, 교무, 담임 선생님이 만세를 외쳤다는 말씀이었다.

 

다음 날 학생의 어머님과 바람의 전학생(?)을 아침에 교실 앞에서 대면하였다. 학생은 연예인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 체구는 평균적이었으며 얼굴에는 불안감과 함께 나이에 맞지 않는 할퀸 상처들이 몇 개 있었고, 인상이 조금 날카로워 보였다. 

 

OO이는 1주일간 잘 적응하는 듯했으나, 과학 시간에 관찰되는 모습은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웠다. 모둠별 실험 도구를 분배하고 활동을 하는데 자석을 자신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고집부리는 OO이가 좀 어이없었는지 아이들은 인상을 쓰면서 말다툼을 하였고 OO이는 내가 다가가 나누어쓰라고 해도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하루는 체육 활동을 하고 오는데 한 학생의 체육책이 반이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 와서는 OO이가 자신의 체육책을 재미삼아 찢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공으로 자신의 머리를 맞추었다고 했다. 체육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알게 되었는데 체육 시간에는 아예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한다고 했다. 하루는 전담 시간에 혼이 났는지 교실에 와서 가위로 연습장을 찍으며 눈물을 보였다. OO이는 다가가 물어보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학부모 상담을 1주일에 2회 이상씩은 했던 것 같다. 하루는 급식소에서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젓가락을 무릎에 대고 휘어뜨리고 있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친구를 밀치고 시비를 걸다가 말다툼에서 밀리니 분을 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밖에 OO이가 보인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행동들은 열거하자면 1시간이 걸릴 것 같다. 

 

상담을 하려면 입을 닫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지각은 1주일에 2~3회씩은 하였으며, 어머님도 애가 학교가는 줄 알았다고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수업 시간에 교사의 안내를 따르지 않는 것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갔다. 이름을 불러서 몇 페이지를 펴라고 2회정도 안내해야 따르는 시늉을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체육선생님은 도저히 지도할 수 없어서 학부모님 동의를 얻어 체육 시간에 대체 활동을 안내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많은 아이들을 만나봤지만 OO이같이 대범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폭력적인 아이는 처음 봤다고 머리를 가로저으셨다.

 

그저,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그 학생에 대한 목표였다. 체육 시간에는 내가 학교 화단을 가꾸거나 교실에서 그림 그리기 활동을 안내하였다. 나 혼자로는 역부족이었기에 학부모님과 상담을 수십차례 하였고, 학년부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께도 협조를 요청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로 진지하게 교감선생님을 찾아가 'OO이를 제외한 20여명의 학생들에게 물리적인 피해와 정서적인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어서 학급을 교체해주시거나, 일방 전출을 요청드린다'고 상담했다. 그러나 교감 선생님께서는 아주 작은 변화지만 조금씩이라도 상태가 좋아지는 것을 근거로 학급에서 지내게 할 것을 부탁하셨다. 학급에서 일반적인 수업에서 OO이가 배제되더라도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말씀해 주셨다. OO이의 행동은 그저 소극적인 의미의 변화였다. 그냥 학교와서 '버티다 집 가기'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피해를 호소하는 학생들이야 적어졌고 물리적인 피해는 줄어들었다.

 

OO이의 행동 변화를 위해 학부모님께 장문의 글을 보낸 적도 있다. 정말 가감없이 OO이의 학교 생활에 대한 것을 기록한 내용이었고, 내가 교사로서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하게 말씀드리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나의 두 번째 실패 경험이 시작된다.

 

전쟁통 같았던 1학기를 마무리하고 2학기가 되었다.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OO이 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얼마나 통화를 많이 했었는지 그냥 목소리가 익숙했다. OO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인해 근교의 작은 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는 말씀이었다.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여쭈지는 않았다. 그저 안내에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OO이가 1학기 때보다 좋아진 모습들을 말씀드리며 잘 적응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OO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 찾아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마트에 가서 나노블럭이라는 장난감을 사다 준 적이 있다. 그런데 OO이가 집중하였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노블럭에 몰두하였다. 운동을 잘하는 장난꾸러기 친구 한 명이 있었다. 둘이서 방과후에 남아 나노블럭 삼매경에 빠졌다. 물론 OO이만 사다 준 것은 아니고 학급 포인트를 다 모은 친구들만 주는 것이었는데 방과 후 친구랑 우연히 남아있던 것이 기회가 되어 나노블럭을 하나 주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매일같이 친구 한 명과 남아서 나노블럭을 조립하였다. 참 보기 좋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OO이는 학부모님 말씀대로 근교의 작은 학교로 전학을 갔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체육선생님과 주변의 선생님들은 나 대신 만세를 불러주었다. 직전 학교의 교장,교감,교무,담임 선생님들이 만세를 불렀다는 게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이루어 졌다. 그러나 정작 나는 만세를 부를 수 없었다. 너무나도 어려운 레고를 만들다가 그 레고가 일순간에 사라진듯한 어리둥절한 기분이 한동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에서는 만세를 불렀다. 가슴아픈 이야기지만, 학급의 아이들도 내심 다행스럽다는 분위기였다.

 

가감없이 말하면 너무 힘들었다. 지도가 힘들었고, 인내심이 시험받는 모든 상황들이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학생은 조금씩 변화되었고 그 변화는 추운 겨울을 마치고 피어낸 싹처럼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책임져주지 못한 것 같은 미안함이 앞섰다. 그리고 OO이를 미워한 내가 참 수치스러웠다. 이 부끄러움이 내 두 번째 실패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하기 너무 어렵고, 너무 힘들고, 너무 싫은 학생은 반드시 있다. 교사도 사람이며, 사람은 기호가 있기 때문이다. 어딜가나 그러한 학생은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누군가가 타인에게 물리적이고 정서적 피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사회가 허용하는 법과 질서를 통해 응당한 대가를 스스로 책임지게 해야하며, 반드시 교정되야 할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학생을 마음 속에 낙인찍고, 그 이상의 차별과 고통을 타인으로부터 유도한다면 그것은 학생이 만들어낸 죄의 결과보다 더더욱 죄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용을 지키는 것은 외줄타기보다도 어렵지만 말이다.

 

이렇게 나의 두 번째 교사, 실패 경험담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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