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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청년의 가치관으로 이해하는 코로나19(COVID-19) 고찰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정체불명의 중증 호흡기 증후군이 발생했다. WHO(세계 보건기구)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호흡기 감염을 코로나19로 명명하게 되었다. 코로나19는 이듬해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하였고 2021년 현재 진행 중이다. 알파 변이, 델타 변이 등으로 바이러스가 변이 되기도 하였다. 전 세계의 의학계와 식약처는 앞다퉈 백신을 개발하였다. 백신을 시중에 내놓기 위해서는 최소 5년의 임상 실험이 필요하지만 펜데믹 상황을 고려하여 국부적인 임상실험을 거친 백신들이 임시방편으로 전 세계에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백신의 종류에 따라 1회 접종만 받는 것도 있고, 2회 접종이 권고되는 백신도 있다. 경우에 따라 교차 접종, 즉 백신 종류를 2가지 이상 번갈아가며 접종하는 방식도 제시되고 있다. 코로나19 치료제는 아직 개발 중이다.
전 세계적인 펜데믹 타격이 가져다준 결과는 크고도 명확했다. 각 나라 행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고 각 나라의 국민적 성향을 방역의 도마 위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각 국의 방역의 성패를 좌우했다. 약 2년여에 걸친 투쟁 끝에 방역의 효과를 보는 나라도 있었고, 의료계의 기능 마비와 행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국민의 대부분이 피해를 보는 나라도 생겼다.
코로나19 이전, 우리가 살아가던 기존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삶의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를 꾀하려는 자들에게는 포기와 희생을 동반한 변혁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시대의 흐름을 게으르게 이해한 자들에게는 코로나19로 인한 삶의 변화는 고통과 절망만 주는 삶의 퇴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2021년 하반기 현재. 코로나19가 종식될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이 세상에 던진 물음은 확실하고 명확하다. 그리고 본 저자는 그 거대한 물음을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본 글은 존 파이퍼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라는 책과 본인이 속해 있는 지역 교회의 설교를 일부 인용한다. 또한 본 저자의 신학적 관점과 철학, 경험 등을 토대로 추가적인 논설을 엮었다.
코로나19는 이 세상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1. 인류는 지금까지 서로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고 있지 않았는가? 물리적 거리였든 심리적 거리였든.
코로나19 방역수칙의 제1원칙은 거리두기이다. 비말을 통해 감염이 시작되기 때문에 물리적인 거리를 넓혀야 최대한 감염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환자의 비말 차단을 위해서도 거리두기가 필요하지만, 환자가 아닌 사람의 감염 예방을 위해서도 거리두기가 요구된다. 우리는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의도치 않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빈 공간이 발생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식당, 학교, 관공서, 공원, 공연장, 병원, 대중교통 등 우리가 생활하는 모든 곳에서 이와 같은 빈 공간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빈 공간은 일상 속 여러 불편함을 초래하긴 했지만 반대로 타인으로부터 침해당하는 많은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게 해 주었다.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그러하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그러하다. 심지어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심리적 태도 또한 견제하게 해 주었다. 내가 내 몸을 지키지 못하면 그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못하며,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은 거리두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넓다고 해서 비말이 차단되는 것은 아니다. 공기청정기, 에어컨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많은 기기로 인해서도 비말이 전파된다고 한다. 또한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닦거나 만지는 습관으로부터도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하게 된다. 마스크는 서로의 얼굴을 가려준다. 얼굴이 가려지면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기 어렵다.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말은 반대로 누군가에게 애써 내 표정관리를 하거나 상대방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마스크는 서로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어떤 표정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게 한다. 우리는 마스크를 통해 '눈치 사회'의 비효율적인 양상을 조금이나마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며 나타나는 효과는 또 있다. 불요불급한 말을 아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쓰면 상대방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뿐더러 나의 말도 잘 전달되지 않는다. 따라서 불필요한 말을 하기 위해 애써 나의 성대를 무리해가며 말하려는 시도가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지금껏 서로에게 불필요한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코로나19는 우리 모두가 지나치게 가깝게 생활하고 있지 않았는가에 대한 큰 물음을 안겨주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 사이의 빈 공간을 통해 서로에게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불필요한 말을 통해 서로의 삶에 간섭하려는 모든 오지랖으로부터도 우리를 보호하여 주었다. 코로나19는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게 만들었으며, 심리적으로도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회적 거리두기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우리를 비교적 자유롭게 만들었고 타인이 만든 편견으로부터도 멀어지게 했다. 결과적으로 배려는 없고 관심만 가득했던 언행을 통해 서로의 인생에 지나치게 간섭하던 것들도 대폭 줄여주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우리가 지금까지 각종 기업, 직장, 생활에서 불요불급한 회식과 모임을 얼마나 얼마나 많이 했었는가를 끈질기게 반추하게 만들었다.
코로나19로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우리가 '당연하다'라고 믿어 왔던 각종 명절의 이동과 종교적 행사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설득해주고 있다.
2. 인류가 멈추었을 때 비로소 정화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는가?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 2분기. 세계 최대의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펜데믹의 여파였다. 세계 최대의 공장들이 문을 닫자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자연의 회복이었다. 미세먼지가 사라졌으며 기후 상승이 견제되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인류가 멈추었을 때 비로소 자연이 정화되고 지구가 제 온도를 찾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주는 물음은 굉장하다. 이대로 가다간 코로나19가 아니더라고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로 인해 인류는 전 지구적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살짝 엿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인류가 결국 한 공동체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는가?
코로나19는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시켰다. 운송의 발달, 유통의 발달은 전 세계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가 인류에게 제공하는 효율성과 이윤은 엄청나다. 그러나 이러한 효율성은 모순적이게도 효율적인 펜데믹 발생을 야기했다. 코로나19 사태는 비단 바이러스로 인한 펜데믹이 아니더라도 정보를 위시한 각종 금융과 국방, 외교, 경제, 인터넷 등 전 분야에서 펜데믹이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류에게 열어두었다. 이처럼 인류는 첨단 과학과 문명의 이기를 통해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비약적으로 극복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이러한 물리적 제약이 축소됨으로 인해 펜데믹의 가속화는 더욱 빨라졌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우리 인류가 결국 하나의 공동체이며, 결국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주지 시켜 주었다.
4. 코로나19는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는가?
코로나19는 그 자체가 굉장한 파괴를 야기했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알파 변이, 델타 변이 등 코로나19 자체의 변이 바이러스도 그러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종류의 감염병이 발생할지 모르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근대사회에서 인류는 의학의 발달과 공중보건의 보편적 발달을 통해 평균 수명 연장과 각종 질병을 극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상. 하수도의 구분, 비누의 발명, 페니실린의 발견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역설하듯이 우리 인류에게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바이러스와 수천수만 가지 변인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질병들의 위협이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코로나19가 하나의 예고편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5. 지도자의 민낯과 실력을 목도했는가?
지도자는 구성원들의 신체. 생명. 재산을 보호함에 있어서 '예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국가의 지도자가 그러하며, 군대의 지휘관이 그러하며, 가정의 가장 등 모든 '리더'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처럼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인해 '예방'에 실패한 경우는 어떠할까? 지도자의 참된 실력은 바로 이러한 '예방'을 초월해버린 '위기'상황에서 그 밑바닥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지도자의 민낯을 드러내게 했다. 행정부의 실력을 도마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인류의 민낯을 공개했다. 또한 각 국의 국민적 성향과 방역에 대한 국가 수준의 이해도에 따라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를 반증하게 했다. 이는 비단 바이러스로 인한 펜데믹이 아니라 이유를 막론한 각종 재해. 재난 앞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예시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자면 코로나19는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지도자'의 중요성을 웅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도자'의 '위기관리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류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이것은 우리가 정치에 문외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정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파급력과 영향력에 대해 반드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정치'가 국민의 실제 생활에 주는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다. 외교적 능력, 사회 간접 자본 활용 능력, 국민적 공감대 형성 능력, 대국민적 호소에 관한 능력, 예산 운영 능력, 기회비용에 대한 결단 능력, 행정부의 나라살림 능력 등 삶의 대부분의 영역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 지역이, 또는 각 권역이, 또는 각 나라가 어떤 지도자를 선출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기준을 코로나19를 통해 새롭게 반추하게 되었다.
6. 불변하는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코로나19는 미지의 바이러스 앞에서 인류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명확하게 입증했다. 물론 후속 조치로서 인류가 이룩한 일들은 위대하다고 할만하다. 봉사 정신, 희생정신 등 이타성에 기반한 전 세계적 노력과 협조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코로나19가 인류에게 교훈한 것은 인류가 굳건하게 믿어 왔던 국가와 사회 등 무형의 조직은 몇 개월 만에 그 기능이 완전히 마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극히 협소한 의미로서도 질병 앞에서 하나의 인생이 단 며칠 만에 스러질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연속 앞에서 우리는 불변하는 것이 있는가에 대한 거대한 물음을 던진다. 코로나19를 위시한 미지의 바이러스와 재해. 재난은 언제든지 전 인류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이라는 큰 질문 앞에서 성경은 단호하게 '진리'를 교훈한다. 성경은 '진리'를 믿어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장중하고 담대한 어조로서 인류에게 '진리'에 대해 웅변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기사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 존재에 대한 설명이 굳이 필요가 없으며, 사람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만물의 창조 이후 인류는 하나님과 죄악 중 죄악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사망'을 언도받는다. 그 '사망'이라 함은 육체의 사망을 초월한 영원한 '사망'을 의미한다.
그 이후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를 다채로운 장르를 통해 가르친다.
성경은 내용적 특징으로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성령론, 종말론 등 약 7가지 범주로서 그 진리를 선포한다. 이 모든 내용은 역사성과 과학성과 예언성을 온전히 충족하고도 남는다. 나아가 서술 방식으로서도 분류할 수 있다.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서신서 등이 그 예다. 통사적 구조로서 성경을 시대 순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코로나19 사태는 사회 조직의 마비와 질병 앞에서의 나약함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과 불확실성이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의미를 확장시키게 하였다.
7. 하나님은 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허용하셨는가?
절대 선, 어느 곳에나 존재할 수 있는 무소부재, 전지 하여서 모든 것을 아는 자, 스스로 있는 자, 모든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전능한 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라면. 하나님은 왜 코로나19를 허용하였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선결문제로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자유'와 '의지'와 '가정법'에 관한 문제다. 이러한 논의 없이 그저 인류에게 닥친 고난을 '전능자'에게 무한히 전가하려는 태도는 우리들에게 지적인 게으름과 분별력의 상실, 무책임과 확증편향이라는 중독성 강한 열매만을 맺게 할 것이다.
'자유'와 관련한 논의다. 자유는 기독교의 사상에서 매우 심오한 주제다. 왜냐하면 초기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유'로 인간은 '전능자'를 선택하기보다는 '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심오한 주제인가? '자유'한 행동의 결과로써 결국 '죽음'을 언도받은 역설적인 상황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자유'라는 주제는 기독교에서 '죄'라는 주제와 변명의 여지없이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죄'라는 주제는 '책임'이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자유'는 '책임'과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의 욕심과 인간의 욕망에 의한 '자유'는 반드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변함없는 가르침이다.
기독교에서 '의지'는 양날의 검이다. 인류의 대표자였다 아담이 '의지'적으로 무엇을 선택했는지 창세기 3장을 넘기기 전에 그 처참한 결과가 나와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의지'에 개입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사랑'과 '연합'의 의미로서 창조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의지'를 박탈하는 것은 창조의 목적에 위배되는 결정적인 실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에게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흔적들이 있겠지만 인간의 욕심과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죄악'에 하나님은 직접 관여하지 않으신다. 아니, 못하신다.
우리는 논리를 통해 '가정법'의 오류 또한 숙고해 보아야 한다.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리는 '가정법'의 위험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리다. 그리고 인류가 경험했던 이해할 수 없었던 재해와 재난, 혹은 명백히 인류가 초래한 재앙 앞에서 우리 또한 손쉬운 방법인 '가정법'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만약 하나님이 히틀러를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다면?'
'만약 하나님이 스탈린을, 모택동을, 크메르 루주를......'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정법을 활용하여 현실을 이해하려 한다면, 혹은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한다면 결국 현실에 남겨진 피해자들과 상처 받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오로지 궤변과 판타지만 남은 기괴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한 결과를 내버려 두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여 전 세계적인 재앙과 재난을 막으실 권능에 동의한다면, 동일한 이유와 동일한 권능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자유의지를 박탈할 가능성에도 동의할 수 있는가?'
8.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난 인류의 악함을 확인했는가?
코로나19는 인류의 악함을 확인하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악함이라 함은 지극히 개인적인 악함과 동시에 조직적인 악함 등을 의미한다. 개인의 자유만을 강요하며 마스크를 쓰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기주의적 행태를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차이니스 포비아(Chinese phobia), 나아가 아시안 포비아(Asian phobia) 현상을 악함의 한 예로 들 수도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일지라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중국인을 혐오하고 폭력까지 불사하는 행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광기가 분별력을 상실할 경우, 오직 피부색에 의해서만 폭력의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그것이 아시안 포비아다. 코로나19로 드러난 인류의 악함은 개인적인 사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직적인 악함도 있다. 종교 집단의 모임을 위해 정부에서 정한 방역 지침도 어겨가며 그들만의 게토를 공고히 해나가는 집단들이 있다. 이미 매체를 통해 알려진 몇몇 이단 종교가 그러하며 부끄러운 일이지만 개중에는 개신교회들도 있다. 마스크 생산과 유통에 관한 사업체적 악함의 사례는 어떤가? 나아가 전 세계 수많은 기업체는 어떤가? 그들의 이미지 메이킹과 반대로 펜데믹을 빙자한 기회주의적 모습은 어떤가? 이처럼 코로나19는 인류의 악함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9.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난 인류의 선함을 확인했는가?
코로나19는 인류의 선함을 확인하게 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코로나19가 처음으로 창궐한 시기에 우리나라 곳곳에서는 의료봉사자들이 대구에 몰려 갔다. 대구는 2020년 신천지의 방역수칙 위반과 집단 감염으로 인해 도시 방역에 큰 타격을 받은 곳이다. 병상은 부족했고, 인력은 더욱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 간호사, 의사 및 의료 종사자와 일반인들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집단 감염 후속 조치와 병원의 일을 도맡아 했다. 대구에서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그러한 활동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스크를 손수 제작하여 각 기관에 무명으로 기부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직적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공기관과 지역 사회에 기부를 했던 재능기부 행렬이 지속되었다. 여전히, 문제가 있는 종교 시설들이 있겠지만 펜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종교 기관은 봉사와 나눔을 실천했다. 전쟁 중에도 멈출 수 없었던 '예배' 혹은 '미사' 등을 멈추고 자발적인 언택트를 선포했다. 펜데믹 사태에 예배 좀 안 한 것을 그렇게 예찬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종교, 특히 신앙의 영역에서 몇 세대를 거듭하여 내려온 전통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몇몇 종교 기관의 무지하고 이기적인 모습들이 민낯을 드러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99%의 종교 기관은 지역 사회의 안전과 방역을 위해 주어진 기준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 기피하는 곳, 가장 낮은 곳이라 불리는 여러 곳에서 그들의 소명을 이 순간에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우리나라 복지 사각지대에서 남 모르게 헌신하는 종교 기관의 선한 영향력과 봉사의 힘은 실로 막대하다. 종교 기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펜데믹 상황에서 보여준 사랑의 도시락 나누기, 김치 나누기, 밥차, 마스크 제작과 기부, 재능 기부 등의 선한 열매들을 열거하자면 그 종류가 방대하다. 따라서, 코로나19는 인류의 선함을 확인시켜주었다.
10. 코로나19로 인해 교회(그리스도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확인했는가?
코로나19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책무는 명확해졌다. 첫째는 '게토(ghetto)'화 하지 말라는 것. 둘째는 힘닿는 대로 도우라는 것. 셋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하셨을지 깊이 성찰해보라는 것이다.
게토화라는 것은 특정 민족이나 특정 집단이 그들만의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문화를 만드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으로는 13~15세기 유대인 강제 격리 구역으로부터 비롯된 뜻이지만 현재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활용되는 단어다. 그리스도인이 게토화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들만의 잔치, 그들만의 축복, 그들만의 은혜, 그들만의 사랑으로 똘똘 뭉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모이기를 힘쓰라'라고 가르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교회의 이익을 위해 모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기 위해서만 모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이유가 목사의 제자를 만들기 위한 모임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모이는 이유가 사교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게토화 되면 안 된다. 더욱이 코로나19가 온 인류를 덮친 펜데믹 상황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교회는 칼빈의 말과 같이 '늘 개혁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된다면 교회는 그 수칙을 올바로 준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교회니까, 그저 모여야 하니까 모인다면 그것은 단단히 잘못된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위에 언급한 대로 서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또한 '강제'하는 것이 아닌, '자유'하는 마음으로 돕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지역 사회가 고통에 처해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두 손 두 발을 걷고 그 고통에 함께 참여한다. 그것이 서로 '십자가'를 지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내가 도울 힘이 있는데도 헐벗은 자, 주린 자, 목마른 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다면 그것이야말로 '죄'라고 명확하게 가르친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은 굉장히 수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누구라도 이러한 가르침을 빌미로 타인을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오는 것이 '자유'다. 사랑은 '자발성'에 기초한다.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자발적인 봉사와 자발적인 헌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코로나19 상황에서 어려움과 고통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나서서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직접적인 복음 선포의 중요성과 시급성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가르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감히 가정할 수 없겠지만 성경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피폐해진 세상의 어떤 곳, 혹은 가장 낮은 곳, 혹은 모든 사람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고 기피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도록 죽기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곳은 비단 해외의 구석진 곳뿐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곳곳 이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한 영혼을 살리는 삶.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사셨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수많은 현대 율법주의자들은 예배당에 나아가 예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비판하고 정죄할 것이다. 언론사 기자와 유튜버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중성!' '예배를 괄시하는 그리스도!' '그리스도, 주일 성수 빼고 단합대회 해' 등 대서특필을 할 것이 자명하다. 여전히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흑백논리가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에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실 말씀은 2천 년을 관통하여 현재를 통찰할 말씀이라 생각한다.
'안식일의 주인은 나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 십자가는 개인의 삶에서의 고난과 어려움일 것이며, 시대적 과제를 포함할 것이다. 현재의 코로나19 펜데믹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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